선화봉사고려도경 제40권 유학
선화봉사고려도경 제40권 동문(同文)
유학(儒學)
동이(東夷)는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가 끊기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땅에서는 본래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잘 알아, 그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고, 음식은 두변(豆籩 두와 변. 모두 법도에 맞게 쓰는 예기(禮器))을 쓰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양보한다. 그리하여 만맥 잡류(蠻貉雜類)들이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발에 굳은 살을 지우며 변발(辮髮)에 횡폭(橫幅 오랑캐의 복식 이름)을 두르고, 부자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친족이 관곽을 같이 하는 따위의 편벽하고 괴이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해서부터는 신첩(臣妾)으로 내속(內屬)하여 중화의 정치 교화가 점차로 미쳐갔던 것으로 비록 위(魏)를 거치고 진(晉)을 지나면서 시대의 기복에 따라 잠시 이탈했다 잠시 합쳤다 하기는 하였으나 의리가 마음속에 뿌리박은 것은 없어진 적이 없었다.
당(唐) 정관(正觀 ‘正觀’은 ‘貞觀’의 잘못.) 초년에 태종(626~649)이 위 정공(魏鄭公 위징(魏徵)의 봉호가 정국공(鄭國公)임)의 한 마디를 써서 인의(仁義)로 정치하고 학교를 넓히며 학자를 숭상하였는데, 이때에도 의론에 참여하였던 대신들은 오히려 의심을 품고 그것의 유익함을 몰랐었다. 그런데 저 나라에서는 서둘러 자기네들의 뛰어난 자제들을 보내어 경사(京師 당시 당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말함)에서 교육시키를 청했던 것이다. 그 후 장경(長慶 821~824) 연간에는 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당대의 시인)가 가행(歌行)을 잘 지었는데, 계림(雞林 우리나라를 말함)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감탄 흠모하여 일금(一金 황금 1금을 말함)으로 한 편을 바꿔서 그것으로 규범을 삼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왜(倭)ㆍ진(辰) 등 나머지 나라들을 살펴보면, 혹은 가로쓰고 혹은 왼쪽으로 획을 긋고 혹은 노끈을 매듭지어 신표로 하고, 혹은 나무를 파서 기록으로 삼고 하여 각각 방법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예서법(隸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의 것으로 바로잡으며, 화폐의 글자와 부절과 인장의 각자에 이르러서는 감히 망령되이 자체를 증손(增損)하지 않으니 문물의 아름다움이 상국(上國)과 맞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송(宋) 나라가 일어나 그 문화가 멀리에까지 미쳐 가자 머리를 조아리고 관문을 두드려 번신(藩臣)이 되기를 청해왔다. 그 사자(使者)가 와서 조정에 들 때마다 나라의 찬란한 문물을 보고서는 그 아름답고 찬란함을 부러워하고, 돌아가서는 서로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더욱 힘쓰게 되었다. 순화(淳化) 2년(991, 고려 성종10)에 천하의 선비들에게 조정에서 시험을 베풀었는데, 그들 역시 자기네 사람들을 빈공(賓貢)으로 보내서 문예(文藝)를 바쳐왔다.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그 수효 안에서 뽑아주시어 왕빈(王彬)ㆍ최한(崔罕) 등은 진사 급제(進士及第)로 장사랑 수비서성교서랑(將仕郞守秘書省校書郞)을 제수하고 배를 태워 귀국케 하였다. 그때의 국왕 치(治 고려 성종(成宗))가 표문을 바쳐 사의(謝意)를 표했는데, 그 언사가 심히 감격스러웠다.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속학(俗學)의 폐단을 근심하시어 삼경(三經)을 훈석(訓釋)하여 천하의 암매함을 없애주도록 명하시고, 특히 조명(詔命)으로 그 책들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대도(大道)의 순전(純全)함을 볼 수 있게 하여 주도록 하시었다. 주상(主上 송 휘종을 말함)께서는 선왕의 뜻을 훌륭히 계승하시어 시사법(施舍法)을 확대시키셨고, 또 내학자제(來學子弟 당시 고려 유학생을 말함) 김단(金端) 등에게 과명(科名 과거 급제의 종류에 따른 명칭)을 내리어 귀국시키셨다. 이리하여 휩쓸리듯 따르고 세차게 교화되어 즐겁고 공경스럽게 유학을 지켜나가 비록 연(燕)ㆍ한(韓)의 변두리 편벽한 곳에 살기는 하지마는 제(齊)ㆍ노(魯)의 기풍과 운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그런데 제후가 공을 이룩하는 것은 실은 천자의 위령(威靈)을 빌린 것이고, 제후가 덕을 드러내는 것은 실은 천자의 교화를 따른 것이다. 고려인은 중국에 대해서는 바다 한 구석의 후백(侯伯)의 나라일 뿐이다. 이제 그들의 문물이 풍성함이 이와 같음은 대체로 점진적인 감화의 소치이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일월을 비롯한 삼진(三辰 일ㆍ월ㆍ성을 말함)은 원기(元氣)를 빌어서 열(列)을 이룩하나, 그것들이 빛으로 나타내는 것은 하늘의 밝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목을 비롯한 온갖 보물은 원화(元化 조화의 위대한 작용을 말함)를 받아서 꽃을 피워내나, 그들 꽃이 아름답게 피고 지고 하는 것은 땅의 문채로 되는 것이다.
그 나라의 선비를 뽑는 제도로 말하면, 비록 본조(本朝 송 나라를 말함)의 그것을 규범으로 삼기는 하지마는, 전승하여 듣고 구례를 따르고 하는 데 따라 약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들은 학생(學生)들에 대해서는 매년 문선왕묘(文宣王廟 공자묘 즉 문묘)에서 시험하는데 합격자는 중국의 공사(貢士 중앙고시에의 응시 자격을 추천받은 자)와 대등하다. 그들의 거진사(擧進士 진사시에 응시할 자격을 갖춘 자)는 한 해 건너 한 차례씩 그 소속지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합격하면 공자(貢者 학생으로 합격한 자를 말함)와 대등해지는데, 도합 3백 50여 인이다. 추천 선발이 끝나면 또 학사(學士)들에게 명해 영은관(迎恩館)에서 전체 시험을 치르게 하여 30~40인을 뽑아, 갑ㆍ을ㆍ병ㆍ정ㆍ무 5등으로 나눠서 급제를 내리는 것이 대략 본조의 성위(省闈 예부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의 제도와 같다. 왕이 친히 시험해서 벼슬을 주는 것으로 말하면 시ㆍ부ㆍ논(詩賦論) 3제를 쓰고 시정(時政)을 책문(策問)하지 않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 밖에 또 제과(制科)와 굉사(宏辭)의 명목이 있는데 조문은 갖추어져 있으나 늘 시행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학(經學)은 그리 잘하지 못한다. 그들의 문장을 보니 당의 여폐(餘弊)와 방불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자료 발췌 -